아직 바람이 쌀쌀하긴 하나 3월의 햇살이 어딘지 모르게 봄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올해 부활절은 유난히 더 기다려진다. 내가 열심히 사순절을 꼽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오늘은 사순절의 절반인 이순(二筍)이 지나고 21일째 되는 날이다.
그동안은 주로 미디어를 절제하며 내 주변의 어지러움을 좀 정리하고 싶었다.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그래도 사순절의 전통적인 실천 덕목(금식, 기도, 구제)을 좇아 의도적으로 노력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음식을 절제하는 금식은 못했지만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던(?) 미디어를 절제하기 위해 무언가 구체적인 액션을 취해야 했다. 아주 조금씩 미디어 절식, 미디어 다이어트를 해나가고, 대신에 이제 겨우 책을 손에 좀 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제는 또 에라~ 모르겠다 하고 폭식(?)을 한 셈이기도 하다.
무엇을 금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건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 속에 예수님을 구하고 그분께 집중하며 그분께로 더 나아가고자 하는 그런 열망이 없는 것을 본다. 너무 잡다한 사람의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내 영혼이 미각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 기도가 달라졌다. “주님, 제게 주님을 열망하는 마음을 주세요. 주님께 대해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 목마르고 주린 마음을 주세요. Give me more of Jesus~!” 이런 기도를 하면서도 맹숭맹숭한 나는 그저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바랄 뿐이다.
그래도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내려 3가지 실천 덕목을 평소보다 더 생각하게 되긴 한다. 이번사순절에 “구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얼마 전 아주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최소한의 생존환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가 묻는 광고에 클릭한 적이 있었다. 한국 해비타트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몸으로 하는 봉사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적으나마 물질로 동참했다.
얼마 후에는, 한국에 나와 있는 불법이주 노동자가 큰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난민 신청을 계속 해오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난민 인정이 쉽지 않아 부득불 불법이민자로 현재 지내고 있단다. 그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와 어마어마한 수술비 소식에 마음이 답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이 조그만 나눔이 무엇이 될까 싶지만... 그래도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굶주린 수많은 백성들을 배부르게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억했다. 주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시고 축복하셔서 그 굶주린 무리를 배불리고도 남은 것을 12 바구니나 거두게 하셨지 않은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구제할 대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3-4)
그런데 오늘 나는 왜 나의 소박한 이 구제의 소식을 나누는가? 올해 내가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마음을 먹은 터라 이렇게 의식적인 실천을 해보는 것이다.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 행하신 그 일,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흉내내 보려고.
나는 재정적 여유가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래도 늘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선교적 필요를 위해 흘려보내며 살 수 있는 기쁨과 은혜를 누렸다. 그래서 나는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풍성하게 누리며 산다는 생각을 자주 해오곤 했다. “하나님은 내게 결코 빚지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것을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님께 더 많이 드리고 희생하는 적은 결코 없다는 말이다. 그분은 독생자를 내게 주셨으므로... All is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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